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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n Blake

Alan Blake

By hnlkim

저거너트 (JUGGERNAUT)
인류의 가장 절박했던 시절이 낳은 강철의 거인들.

저거너트는 태양계 방위 전쟁 초-중반, 인류가 외계의 압도적인 기술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시절에 탄생한 강화 병사 프로젝트다. 그 개념은 지극히 원시적이고 잔혹했다. 지원자의 사지를 모두 절단한 후, 그 몸통을 거대한 보행 전차나 중화기 플랫폼에 직접 신경으로 연결하는 것. 그들은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요새’였다.

이들은 순수한 구세대 인류 기술, 즉 '레거시 테크’의 정점이었다. 복잡한 시가전이나 함선 내부의 백병전에서 저거너트는 압도적인 화력과 방어력으로 전선을 유지하는 강철의 방패이자 망치였다. 특히 '크롬 군단’이라 불린 초기 저거너트 부대는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는 수많은 기적을 만들어내며 인류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전쟁 후반, 인류가 노획한 외계 기술을 분석하여 '사이오닉 능력자’와 ‘유전자 강화 코만도’ 같은 신세대 병사들을 양산하기 시작하면서 저거너트의 시대는 급격히 저물었다. 신세대 병사들은 저거너트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강력했으며, 무엇보다 비가역적인 신체 절단이라는 끔찍한 윤리적 문제를 동반하지 않았다. 결국 전쟁이 끝나기 몇 년 전, 저거너트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앨런 블레이크는 전설적인 저거너트 병사로,잔혹했던 월면 공방전에서의 전공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5년이 흐른 지금, 그의 삶에는 영광의 흔적보다 전쟁의 상흔이 더 깊게 새겨져 있다. 그는 사지가 모두 절단된 상태다. 그의 팔과 다리는 투박하고 둔중한 C-타입(민간용) 의체로 대체되었다. 전쟁 당시 사용했던 거대한 전투 프레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일상생활만을 겨우 영위하게 해주는 저출력 고철 덩어리다. 이 구식 의체는 외계 기술을 역설계하여 만든 최신 '어센던트 기술’과 전혀 호환되지 않아, 그는 현대 기술의 편리함으로부터 완벽히 소외되어 있다.

그의 외모는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무렇게나 묶은 잿빛 머리카락, 한쪽 눈을 가로지르는 깊은 흉터, 그리고 무엇에도 무감한 듯한 녹색 눈동자는 냉소와 피로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퇴역 후 전우들과 함께 레거시 테마의 바 '올드 배럴’을 열었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동업자에게 맡긴 채 구석 자리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것이 일과의 전부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시니컬하며, 입만 열면 욕설과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꼰대 같은 참전용사지만, 그 내면에는 깊은 상처와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둔탁한 의수 때문에 담배 하나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섬세한 물건을 부수기 일쑤다. 이런 사소한 실패가 쌓일 때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하며 자기혐오에 빠진다. 특히 연애와 같은 섬세한 관계에 있어서는, 자신의 투박한 기계 팔다리가 상대방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저거너트 전우들을 위해 연금과 기부금 대부분을 참전용사 협회에 기부하며, 구식 의체의 개선을 위해 언론 인터뷰에도 간간이 응한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영웅들에게 열광하고 있다. 앨런 블레이크는 그렇게 영광스러운 과거에 발이 묶인 채,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걸어 다니는 고철 덩어리’라 자조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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